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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와 7년도 미야기시마즈 전승관 특별 전시사료 해설

記事ID:79872 更新日:2025年10月10日更新 印刷ページを表示する 大きな文字で印刷ページ表示

  전시사료 해설

1 일본의 괴이 · 요괴 현상

2 사람과 괴이의 연결 - 정치 · 문화에 미치는 영향 -

3 미나미큐슈의 괴이담

4 시마즈 영내에서의 괴이의 수용과 문화·영정에의 반영

사료 해설

1 일본의 괴이 · 요괴 현상

쓰쿠모가미

쓰쿠모가미란 오랜 세월을 거쳐 물건에 깃든 영혼(정령)이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동물이나 무기물 등 만물에 영혼이 깃든다는 생각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쓰쿠모가미의 존재도 그러한 애니미즘(※)적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무로마치 시대에 제작된 “쓰쿠모가미 두루마리 그림”에는 물건의 영혼은 100년이 지나면 신비로운 능력을 얻는다고 쓰여 있다. 본 두루마리 그림에서는 100년이 지나기 전에 버려진 물건들이 인간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귀신이 되지만, 호법동자에게 져서 항복하고, 최종적으로 불교 수행을 거쳐 성불하는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쓰쿠모가미가 귀신이 되는 전개는 고대에 귀신이 “나쁜 영혼을 총칭”하는 역할을 했던 것과 크게 관련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애니미즘…자연계의 모든 사물에 영혼, 정령이 깃든다는 신앙이나 사상.

 

 

[미즈키 시게루 작 복제 원화]  세로 29.7  가로 42.0   【전체 기간 전시】

미즈키 시게루가 제작한 요괴화의 복제. 미즈키 시게루의 요괴화는 수채화로 채색되어 있다.

미즈키 시게루

1922년 3월 8일생. 돗토리현 사카이미나토시에서 유소년기를 보낸다. 집안일을 하러 와있던 가게야마 후사(“농농할멈”)의 영향으로 요괴의 세계에 관심을 가진다. 1943년에 라바울로 출정. 현지에서 폭격을 당해 왼팔을 잃고, 1946년 3월에 귀환. 종전 후 종이 연극 작가로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1958년 만화가로 데뷔. 대표작으로 ‘게게게의 키타로’, ‘악마군’, ‘결정판 일본 요괴 대전’ 등이 있다. 2015년 11월 30일 서거.

2 사람과 괴이의 연결 - 정치 · 문화에 미치는 영향 -

​간문일기  1443년 7~8월

  • 세로 26.2  가로 18.3  에도 시대  국립공문서관 소장  【전기 전시】

무로마치 시대 전기의 고스코인(1372~1456)이 쓴 일기. 1416년 1월 1일~1448년 4월 7일의 기사로 이루어져 있다(일부 누락). 정치와 경제, 문화 등 언급되는 화제는 여러 방면에 걸쳐 있으며, 당시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사료이다. 전시 부분은 1443년 8월 13일 ‘간레이 마구간의 말이 말을 하다’ 항으로, 마구간에서 기르고 있는 말이 사람 말을 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말이 말을 하는 현상은 ‘간문일기’ 이외에도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괴이한 일은 나중에 재해나 병의 유행 등 불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당시 사회적 사상과 괴이함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속일본기 34권

  • 세로 30.9  가로 22.5  에도 전기·1614년  국립공문서관 소장  【후기 전시】

“속일본기”는 “일본서기”를 잇는 칙찬 역사서. 총 40권으로 이루어지며, 몬무천황이 즉위하는 697년부터 간무천황의 791년 12월까지를 편년체로 기술한다. 797년 성립. 전반 20권을 스가노노 마미치(741~814) 등이, 후반 20권을 후지와라노 쓰구타다 등이 편찬했다고 전해진다. 나라 시대의 근본 사료로 중시되고 있다.

전시 부분은 777년 3월 신미 항으로, 궁중에 “요괴”가 자주 나타나 큰 액막이 의식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 항은 일본에서 ‘요괴’라는 표기가 처음 나온 곳이며, 당시 사람들이 괴이 현상에 대해 국가적 대책을 어떻게 세웠는지 엿볼 수 있는 사료이다.

열조제도 삼십구권 하

  • 세로 25.2  가로 17.0  에도 후기  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소장  【전체 기간 전시】

“열조제도”는 가고시마번의 정치, 경제, 지리, 역사, 천문, 종교, 의례 등 다방면에 걸친 분야의 규제 법령과 통계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원본은 에도 시대 말기에 잃어버렸지만, 사본이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가고시마대학 부속도서관 다마자토문고, 가고시마 현립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다.

전시 부분은 ‘음양·무축’에 관한 항이다. 1791년에 에도 막부에서 나온 문서로, 이에 따르면 음양도를 직업으로 하는 자는 쓰치미카도 가문이 지배해야 하지만, 최근 그 규칙이 무너지고 있다. 함부로 음양도를 하는 무리가 있다는 말이 들리고 있으니, 앞으로는 음양도의 마음가짐을 어기지 말고 쓰치미카도 가문으로부터 면허를 받아서 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쓰치미카도 가문은 음양도, 천문, 달력을 관장하며 조정을 섬긴 벼슬 집안으로, 헤이안 시대 중기의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를 선조로 한다.

헤이케 이야기  삼권

  • 세로 22.6  가로 18.5  에도 시대  국립공문서관 소장  【전체 기간 전시】

헤이케 이야기는 가마쿠라 시대 전기에 만들어진 군기 이야기. 다이라노 기요모리(1118~1181)를 비롯한 헤이케(다이라 가문)의 흥망성쇠를 그린다. 작가 및 성립된 해는 미상이다. 이본이 많이 존재하며, 현재 전해지고 있는 제사본은 비와법사가 절과 신사를 거점으로 결성한 도도자(맹인들의 직능조합)가 이야기의 본문으로 정한 도도계 이야기와 비도도계 이야기로 나뉜다. 본 사료는 전자로 분류된다.

전시는 ‘사문(赦文)’ 부분. 1178년 정월,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딸이자 다카쿠라 천왕의 중궁인 겐레이몬인(다이라노 도쿠시)이 회임했고, 일족이 기뻐하며 황자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궁의 몸 상태가 나빠졌고, 결국 고개도 겨우 들 정도가 되었다. 이 상황에 대해 점을 치자, 많은 원령과 생령이 중궁에 들러붙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요모리는 즉시 대책을 마련하여 원령이 된 영혼을 진정하기 위해 벼슬을 내렸고, 또한 기카이가시마 섬에 유배된 사람들을 사면해 주고 다시 불러왔다. 고대에는 원령과 생령의 존재에 큰 의미가 있었으며, 때로는 사회적으로 큰 사건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본 사료는 고대 원령 사상의 존재 방식이 반영된 이야기이다.

야스나리 요괴 조복도​

  • 세로 37.9  가로 75.0  에도 말기·19세기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전기 전시】

다마모노마에 전설을 소재로 한 우키요에. 다마모노마에의 정체는 금색털 구미호의 화신이자 인도와 중국에서 왕을 현혹하여 국가를 파멸로 몰아넣은 끝에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절세 미녀라는 다마모노마에의 소문을 들은 도바 상황은 소실로 삼지만, 점차 정기를 잃어 간다. 상황을 걱정한 가신들은 음양사 아베노 야스나리에게 점을 의뢰하고, 야스나리에게 정체를 들킨 다마모노마에는 여우의 모습을 드러내 시모스케국 나스노(도치기현 북동부의 평야)로 도망쳤다. 그 후, 무사 가즈사 히로쓰네(?~1183)와 미우라 요시즈미(1127~1200)에게 토벌당하지만, 그 영혼은 돌로 바뀌어 가까이 오는 생물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다마모노마에 전설은 중세에 요곡 ‘살생석’으로 널리 퍼졌고, 소설책 ‘다마모 소설’과 두루마리 그림, 소설 등 다양한 창작물의 소재가 되었다. 시마즈 가문의 문서 ‘다마모노마에’ 이야기와 줄거리는 비슷하지만 정체가 드러난 후의 전개가 다르다.

본 작품은 음양사 아베노 야스나리에게 정체를 들킨 다마모노마에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도망치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작가인 우타가와 시게노부(1826~1869)는 초대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의 제자이다. 1858년에 초대 히로시게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1859) 2대 히로시게로 이름을 계승했다. 초대의 화풍을 따라 풍경화와 미인화를 잘 그렸다.

 국보 곤자쿠 이야기집(스즈카본) 27권

  • 세로 32.4  가로 28.0  헤이안 시대 말기~가마쿠라 시대 초기  교토대학 부속도서관 소장  【후기 전시】

“곤자쿠 이야기집”은 헤이안 시대 후기의 설화집이다. 12세기 초에 성립되었다고 한다. 총 31권 중 28권이 현존한다. 작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미상. 1,000여 개의 설화가 3부(인도, 중국, 일본)로 나뉘어 담겨 있다. 각 설화는 기본적으로 ‘옛날 옛적에’라는 말로 시작해 ‘라고 전해진다’로 끝나는 기본 형식에 따라 기록되어 있다. 수록 내용은 주로 불교사의 세계를 그리는 설화와 속세를 그리는 설화로 나뉘며, 27권은 후자에 해당한다.

전시 부분은 ‘아리와라노 나리히라 주조 여피담귀어’(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의 여자가 귀신에게 먹힌 이야기). 우콘의 주조(中将)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는 아름답다고 소문난 여성에게 마음을 품지만, 여성의 부모는 ‘고귀한 분을 사위로 맞겠다’며 애지중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날, 무슨 수를 썼는지 여성을 훔쳐내어 기타야마시나(현재의 교토시 야마시나구 북부) 주변에 있는 오래되어 쓰러져가는 산장의 창고에 숨었다. 그러자 번개와 천둥이 쳤고, 주조는 여성을 창고 안쪽에 숨긴 후 허리에 찼던 칼을 빼 들었다. 이윽고 번개가 그치고 밤이 밝았지만 여성이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돌아보자, 여성의 머리와 옷만 남아 있었다. 도망쳐 돌아온 주조가 나중에 안 사실은, 그 창고는 “사람을 먹는 창고”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번개와 천둥은 모두 창고에 사는 귀신의 짓이었다. 본 설화는 ‘잘 모르는 곳에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라는 교훈적인 결말로 마무리 짓고 있다.

 ​국보 시마즈 가문의 문서 ‘다마모노마에’

  • 세로 23.5  가로 32.6  에도 시대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소장【상권: 전기 전시  하권: 후기 전시】

본 작품은 나라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걸쳐 제작된 그림 채색 사본 ‘나라 그림책’의 일례로, 헤이안 시대 말기에 도바 상황(1103~1156)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는 전설의 인물 다마모노마에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고노에 천황의 치세, 도바 상황의 거처에 화녀가 나타나 상황의 총애를 받았다. 대단한 미모를 가진 재원이자, 그녀에게 질문하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관현음악회에서 몸에서 빛이 나 ‘다마모노마에’라고 불렸다. 그런데 천황이 병에 걸려 음양료 장관이 점을 쳤고, 시모쓰케국 나스노에 사는 늙은 여우의 화신인 다마모의 짓임이 밝혀졌다. 그래서 다마모에게 태산부군제의 공물을 준비하게 하자, 제문 도중에 모습을 감췄다. 토벌 명령을 받은 무사 가즈사 히로쓰네와 미우라노스케가 나스노로 잡으러 가서 쌍고리 여우를 발견하지만 잡지 못하고, 일단 돌아왔다가 다시 가서도 놓치는 상황이었다. 어느 날 밤, 두 사람의 꿈에 젊은 여자가 나타나 수호신이 되기를 바라지만 거절하고, 다음 날 드디어 잡을 수 있었다. 여우의 몸속에서는 금항아리와 검 등이 나와서 각자 나누어 받았으며, 보물 창고에 가두어졌다고 한다. 이때 여우 사냥이 후일의 이누오우모노(말을 타고 개쫓으며 활로 쏘는 경기)의 발상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우지 슈이 이야기

  • 에도 초기  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소장  【일, 삼, 사권: 전기 전시 십일, 십이, 십사권: 후기 전시】

우지 슈이 이야기란, 가마쿠라 초기에 제작된 설화집. 15권으로 구성된다. 엮은이 미상. 귀족·불교·민간과 관련된 민화 197화가 수록되어 있다. ‘곤자쿠 이야기집’, ‘고사담’ 등에 같은 내용, 유사한 설화가 포함되어 있다.

일권
  • 세로 22.5  가로 15.9

제십칠화 ‘수행자, 백귀야행에 섞이다’ 

옛날 옛적에, 어느 수행자가 셋쓰국(현 오사카부 북중부의 대부분 및 효고현 남동부)에 갔다가 해가 저물어 버려, 어쩔 수 없이 류센지라는 사람이 살지 않는 오래된 절에 묵기로 했다. 경내에서 부동명왕의 주문을 외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수상쩍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 들어 왔다. 각자 자기 자리에 앉았지만, 그중 하나는 수행자가 이미 앉아 있어서 장소가 부족해졌다. 앉지 못한 한 사람 때문에 수행자는 절당의 처마 아래로 옮겨졌다. 곧 그 사람들이 떠났고, 밤이 밝은 후 수행자가 주위를 둘러보니 절은 없고 지나왔을 길도 사라져 있었다. 당황해하고 있는데 일행과 함께 말을 탄 사람들과 우연히 만났다. 수행자가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히젠국(현 사가현 및 나가사키현)이라고 했다. 그 후, 길이 있는 곳까지 따라간 수행자는 교토까지 가는 길을 듣고 배편으로 교토에 갔다. 상경 후, 수행자는 동료에게 그 일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삼권
  • 세로 22.6  가로 16.1

제십이화 ‘여우, 집에 불을 지르다’

옛날 옛적에, 가이국(현 야마나시현)의 지방관 고쿠시, 군지 등의 관사에서 일했던 무사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해 질 무렵에 관을 나와 집으로 가는 도중에 여우를 보고 뒤를 쫓으며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여우의 허리에 명중했고, 여우는 괴로운 듯이 울며 풀숲으로 도망갔다. 무사는 여우를 쫓아 다시 화살을 쏘려 했지만, 놓쳐 버렸다.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조금 전 보았던 여우가 불을 들고 달려가는 것이 보여서 뒤를 쫓았는데, 여우는 사람 모습으로 변신하여 집에 불을 질렀다. 무사는 말을 달려 화살을 쏘려고 했지만,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여우는 풀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여우 같은 동물이라도 바로 원수를 갚기 때문에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권
  • 세로 22.7 가로 16.0

제일화 ‘여우, 사람으로 변해 시토기를 먹다’

옛날, 어떤 사람이 귀신에 씌어서 다른 여자에게 잠시 영혼을 옮기자 물건 귀신이 말하기를 “나는 벌을 내리는 귀신이 아니다. 떠돌며 지나가는 여우이다. 우리 집에는 아이가 있어 물건을 탐내는데, 이런 곳에는 음식이 떨어져 있을 것 같아 찾아왔다. 시토기(쌀가루로 만든 떡)를 먹고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쟁반 가득한 시토기를 마련해 주자, 맛있다며 먹었다. 사람들은 그 여자가 시토기를 먹고 싶어서 귀신에 씐 것처럼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얄밉게 생각했다. 이윽고 여자는 “종이를 주시면 이걸 싸서 돌아가 노인과 아이들에게 먹이겠다”라고 했고, 종이에 싸서 가지고 가게 했다. 여자는 수행자에게 “나를 따라오세요. 돌아갑시다”라고 말하며 일어선 후 엎드려 쓰러졌다. 곧 일어났지만, 여자가 품에 넣은 보따리는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것은 이상한 일이다.

십일권
  • 세로 22.7 가로 15.9

제삼화 ‘세이메이, 개구리를 죽이다’

어느 날, 아베노 세이메이가 히로사와에 있는 승정(우다 천황의 황자, 아쓰미 친왕의 아들)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젊은 중들이 세이메이에게 “당신은 시키가미(※)를 쓸 줄 안다고 하는데, 순식간에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세이메이는 “쉽게 죽일 수는 없지만, 힘을 주면 죽일 수 있지요”라고 답했다. 이어서 “벌레 같은 것은 힘을 조금만 줘도 반드시 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살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그런 일은 무익합니다”라고 말하자, 5~6마리의 개구리가 정원으로 나와서 연못 쪽으로 뛰어올랐다. 젊은 중이 “하시는 말씀이 사실이라면 저걸 하나 죽여 주십시오. 시험 삼아 보여주시지요”라고 해서, “스님이 죄를 지으시려는군요. 하지만, 저를 시험하려고 하시니 죽여서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세이메이는 풀잎을 따서 주문을 외우듯이 개구리 쪽으로 던졌고, 그 잎이 개구리 위에 얹힌 순간 납작하게 눌려 죽어 버렸다. 이를 본 중들은 안색이 바뀌며 무서워했다. 세이메이는 집안에 사람이 없을 때 시키가미를 쓰는 듯했다. 저절로 격자문이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하고 문이 닫혔다고 한다.

(※) 시키가미…음양도에서 음양사가 일을 시킨다는 귀신.

십이권
  • 세로 22.7  가로 16.0

제이십사화 ‘이치조 간이 가옥, 귀신의 짓’

옛날 옛적에, 이치조에 있는 간이 가옥에 어떤 남자가 묵으며 유녀와 함께 자고 있는데, 한밤중에 거센 바람이 불고 비도 내렸다. 그 와중에, 큰길에 ‘제행무상’이라고 외치며 지나가는 자가 있었다. 누구인지 궁금하여 문을 살짝 열어 보니, 키는 처마만큼 오고 말의 머리를 한 귀신이 있었다. 무서워서 문을 닫고 안쪽으로 들어갔지만, 귀신이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며 “잘도 보았구나, 잘도 보았어”라고 했다. 그래서 다치 칼을 뽑아 들고 “들어오면 베겠다”라고 자세를 취하며 유녀를 옆에 두고 기다리고 있자, 귀신은 “똑똑히 봐 두게나”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남자는 “이것이 백귀야행이라는 것인가”라며 무서워했다. 그 후로 다시 이치조의 간이 가옥에 묵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십사권
  • 세로 22.6 가로 15.9

제십화 ‘미도칸파쿠의 개, 세이메이 기특해하다’

옛날 옛적에, 미도칸파쿠(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호조지 절을 지은 후 매일 불당에 왔다. 여기서 흰색 개를 귀여워하며 키웠고, 개는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했다. 어느 날, 평소처럼 함께 있었는데, 문을 들어가려고 할 때 개가 앞을 가로막고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라며 가마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개가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다. 칸파쿠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아베노 세이메이에게 사자를 보내 서둘러 오라고 전했다. 바로 온 세이메이에게 이유를 묻자, 잠시 점을 친 후 “그대를 저주하는 물건이 길에 묻혀 있습니다. 만일 주물을 넘어가 버리면 불길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개는 신통력이 있는 생물이어서 그것을 알려준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칸파쿠가 “그렇다면 주물은 어디에 묻혀 있는가. 점쳐서 찾아내거라”라고 하자, 다시 점을 쳐서 ‘여기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곳의 흙을 5척 정도(약 1.5m) 파 보니 문제의 물건이 발견되었다. 질그릇 토기 2개가 노란색 종이끈으로 십자 모양으로 묶여 있었다. 묶인 질그릇 토기를 펼쳐 보니 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저 질그릇 토기의 바닥에 붉은색으로 ‘한 일(一)’ 자가 쓰여 있을 뿐이었다. 세이메이는 ‘이 주술은 세이메이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혹시 도마법사(아베노 세이메이의 제자 음양사 아시야 도만)가 한 짓이 아닐까요. 물어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품에서 종이를 꺼내 새 모양으로 접어 주문을 담아 하늘로 던졌고, 곧 백로로 변해 남쪽으로 날아갔다. 사자에게 “이 새가 들어가는 곳을 보고 오라”라며 보냈고, 새는 로쿠조보몬 마데노코지 부근의 낡은 집으로 들어갔다. 사자는 곧 집주인인 노법사를 잡아 왔다. 저주의 이유를 물으니, 법사는 “호리카와 좌대신 아키미쓰 공의 이야기를 듣고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됐으니 귀양을 보내야 하지만, 도마의 죄는 아니다”라며, 앞으로는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노법사에게 경고한 후, 본국 하리마(현재의 효고현 서남부)로 쫓아 보냈다.

이 아키미쓰 공은 사후 원령이 되어 미도칸파쿠에게 저주를 내렸다. 악령 좌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미도칸파쿠는 이 개를 더 귀여워했다고 한다.

백귀야행 두루마리 그림(모본)

  • 세로 28.1  에도 시대·1806년  도쿄국립박물관소장  【전기 전시】

가노 단유(1602~1674)가 17세기에 제작했다고 전해지는 ‘백귀야행 두루마리 그림’의 모본으로, 모사는 미상. 냄비와 솥, 금(琴), 비파 등 오래된 물건이 변신한 요괴들이 유머러스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본 작품과 같이 오랜 세월을 거친 끝에 생각을 품게 된 물건류(쓰쿠모가미)를 연속적으로 그리는 두루마리 그림은 무로마치 시대(16세기) 이후에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특히 교토 다이토쿠지 절 신주안이 소장한 ‘백귀야행 두루마리 그림’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며, 일본 국내외에 많이 전해지는 제본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고마쓰 가즈히코 씨에 따르면 ‘백귀야행 두루마리 그림’은 “신주안본” 외에 교토시립 예술대학이 소장한 “교토시 예대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가 소장한 “일문연본”, 효고현립 역사박물관이 소장한 “효고현 역박본” 4개의 계통으로 나뉘며, 각각 그려진 요괴와 화면 구성 등에서 차이를 볼 수 있다. 전시 사료에는 “신주안본”과 같은 요괴가 그려져 있지만, 등장하는 순서는 다르다.

읍부동연기

  • 세로 31.7  무로마치 시대·15세기  나라국립박물관 소장  【후기 전시】

부동명왕의 은혜를 그린 두루마리 그림.

병을 앓았던 미이데라(사가 온조지 절)의 승려 지코를 대신하게 된 제자 쇼쿠는 평소 믿고 있던 회화인 부동명왕상이 그 병을 거두어 가서 살아난다. 부동명왕상은 마귀에 의해 지옥으로 끌려 가지만, 염라대왕과 대면 끝에 지옥에서 풀려난다. 전시 부분은 쇼쿠의 의뢰로 지코가 앓는 병의 앞날을 점치는 아베노 세이메이를 그린 장면. 시키가미(젠키·고키)를 데리고 기도하는 세이메이의 앞쪽에는 역병의 신 여럿이 앉아서 대면하고 있다.

​요괴도권

  • 세로 29.1  에도 시대·17세기 규슈국립박물관 소장  【후기 전시】

에도 시대 전기에 활동한 가노파 화가 가노 무네노부(생몰년 미상)가 제작한 두루마리 그림.

무네노부는 간에이 연간(1624~1644)에 나카바시 가노 가문을 세운 가노 야스노부(1614~1685)의 제자로 전해진다. 본 작품에는 사람으로 변신한 여우와 살쾡이, 거인 요괴, 고양이 요괴, 갓파, 설녀, 땅거미 등 다양한 요괴가 나란히 그려져 있으며, 각 장면에 설명은 없다. 본 작품과 같은 도감적인 표현은 에도 시대의 작품에서 그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귀신·요괴를 “공포의 대상”이 아닌 “오락의 대상”으로 여긴 당시 사람들의 사상이 배경에 있었다고 한다.

게이슈 부다유 이야기 두루마리 그림

  • 세로 25.7  에도 후기  다치바나 가문 사료관 소장  【전체 기간 전시】

와나가와 번주 다치바나 가문에 전해지는 총 3권의 두루마리 그림.

에도 시대에 빈고국 미요시(현재의 히로시마현 미요시시)에 살았던 이노 부다유(1734~1803)가 아명을 헤이타로라고 칭했던 1749년 7월에 경험한 일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음력 7월 1일부터 시작되는 30일 동안 헤이타로를 찾아온 다양한 귀신이 능숙한 붓놀림으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요괴 이야기는 에도 시대 이후, ‘이노 물괴록’이라는 총칭으로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본 작품은 종반에 마왕이 등장하는데, 예복을 입은 무사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달려들려고 하는 헤이타로를 제지하는 등 귀신의 이미지와 조금 동떨어진 인간미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종규도  미와 조세이 필

  • 세로 82.5  가로 41.8  쇼와 시대  개인 소장·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보관 【전체 기간 전시】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에 전해지는 족자로, 역병신을 내쫓고 액운을 막는다고 믿었던 중국의 민간 전승에서 유래하는 도교신 종규가 그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종규를 헤이안 시대 말부터 믿었다.

전승에 따르면, 당나라 황제 현종(685~762)이 병들어 누워 있을 때 꿈속에서 악귀를 퇴치하는 인물을 보게 된다. 현종이 정체를 묻자 “나는 종남현 출신의 종규이다. 관리가 되기 위해 과거를 보았지만 낙방하고, 이를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고조 황제(당나라 초대 황제)가 극진하게 장례를 치러 주어서 은혜를 갚기 위해 왔다.”라고 대답했다. 꿈에서 깬 현종의 병은 말끔히 나았고, 이후 종규는 액막이와 입시의 신으로 모셔졌다고 한다.

미와 조세이
  • 1901년~1983년

니가타현 출신의 일본 화가. 1921년에 교토시립 미술공예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후, 교토시립 회화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도모토 인쇼(1891~1975)의 제자가 된다. 1924년에 졸업한 후, 조세이(超世)라 칭하며 1927년에 ‘히가시야마(東山)’로 제국미술원 전람회에 첫 입선. 그 후 여러 차례 상을 받는다. 1960년에 일본미술전람회 평의원으로 취임. 1969년에 일본미술전람회 이사, 1977년에 참여, 1980년에 고문이 되었다. 화려한 색채와 장식적인 화면 구성이 특징이다.

미야자키현 지정문화재 연감  십의 십이

  • 세로 24.5  가로 15.7  에도 중기  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소장  【전체 기간 전시】

본 사료는 중국 청 시대에 제작된 유서(백과사전)인 “연감류함”을 옮겨 쓴 것이다. “연감류함”은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재위: 1661~1722)의 칙명으로 편찬되었으며, 천부에서 충치부에 이르는 45부를 더 세부화한 45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710년 완성. 내각대학사 장영, 시인 왕사정 등이 편찬 작업을 총괄했으며, 130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작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전시 부분은 음양에 관하여 해설하고 있다. 본 항은 45부 중 세시부로 분류되며, 이 외에 율과 력, 오행, 세 등의 항목을 다루고 있다.

3 미나미큐슈의 괴이담

 국보 시마즈 가문 문서  시즈노 오다마키

  • 에도 시대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소장  【칠권, 십권: 전기 전시  사권, 구권: 후기 전시】

“시즈노 오다마키”는 가고시마 번주의 명령으로 국학자 시라오 구니하시라(1762~1821)가 정리한 설화집이다. 총 1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에 편찬 경위가 쓰여 있다. 이에 따르면, 1804년에 에도의 가고시마번 저택에서 현존하고 있는 것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까지 모아서 잠깐의 즐거움으로 정리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므로, 널리 세상에 전해져온 다양한 이야기와 희귀한 괴담을 수집하고 삽화도 더해 헌상했다고 한다. 그 상선본은 1806년 3월 4일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고, 1811년 12월에 원본 초고를 모사하여 헌상하도록 다시 명령이 내려왔다. 원본 및 재헌상본은 모두 현존하지 않으며, 시마즈 가문본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온 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사권
  • 세로 27.0  가로 19.7

삼화 ‘다케우치 스케이치, 덴구의 깃촉을 베다’

본가 제19대 시마즈 미쓰히사(1616~1694) 때의 요리사 다케우치 스케이치가 다테노 사토코지(현재의 가고시마시 시모타쓰오초 부근)에서 만난 덴구의 날개를 칼로 베어낸 이야기.

스케이치는 시마즈 가문 관계자의 간병을 위해 매일 저녁부터 축삼시(오전 2시~2시 반 무렵)에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다테노 사토코지의 숲속을 지나왔을 때 새 날갯소리와 함께 뭔가가 머리 위를 스쳐서 들고 있던 칼로 베어냈고, 근처에서 칼에 베여 떨어진 날개를 발견했다. 스케이치가 그 날개를 가지고 돌아온 다음 날 밤, 어둠 속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와키자시 칼을 손에 들고 밖으로 나갔다가 뭔가와 싸우게 되었다. 결국 그자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나이 든 솔개가 덴구로 변신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칠권
  • 세로 27.1  가로 19.5

오화 ‘소노코리고의 이무기’

오스미국 소오코리고(현재의 기리시마시 기리시마타구치에서 고쿠부시게히사 부근 일대)의 토착 무사 쓰마가리 겐베에가 이무기를 물리쳤다는 이야기.

1799년 4월 12일, 멧돼지 사냥을 위해 하루노산의 목장(가고시마번의 말 목장)에 나갔다가 이무기와 조우한 겐베에는 들고 있던 철포로 이무기의 목을 쏘고 사람이 사는 마을로 도망쳤다. 도망친 곳에서 만난 지인은 겐베에에게 이무기를 죽이면 저주를 받는다는 전설을 가르쳤고, 둘 다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입막음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지인이 사건 장소에 가 보니, 숨이 끊어진 이무기가 있었지만 관습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하루노산의 목장에서는 이전부터 망아지가 사라지는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 이무기가 퇴치된 후에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겐베에가 한 일은 소중한 번의 말을 지키는 것으로 이어졌지만, 결과적으로 이 공적은 널리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구권
  • 세로 27.0  가로 19.5

육화 ‘렌쿄인, 대낮에 늙은 여우에게 매료되다’

휴가국 모로카타군 쇼나이 야마다(현재의 미야자키현 미야코노조시 야마다초) 시이카와치의 수행자 오니쓰카 렌쿄인이 한 마리의 늙은 여우에게 못된 장난을 쳤다가 앙갚음당하는 이야기.

렌쿄인이 볼일을 보러 도성 마을로 가고 있을 때, 길가에 늙은 여우가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귓가에 소라고둥을 불어 놀라게 했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아직 해가 지기에는 이른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해가 저물고 어둠에 휩싸여서, 가는 길에 나타난 작은 불당에서 쉬기로 했다. 그러자, 횃불을 든 5~6명의 남자가 불당 앞마당에 무덤을 파고 관을 묻은 후 떠났다. 남자들이 떠난 후 무덤 속에서 여자 유령이 나타나 쫓아왔다. 렌쿄인이 불당의 마룻대까지 도망치며 소라고둥을 불자, 여자는 사라지고 어둠도 걷히고 원래의 해지기 전 풍경으로 돌아왔다. 일련의 상황을 가까이서 보고 있던 농민에게 추궁당한 렌쿄인은 나중에 자초지종을 고백했다고 한다.

십권
  • 세로 27.2  가로 19.6

사화 ‘대형 거미’

시마즈 가문의 보다이지 절, 후쿠쇼지 절에 자리 잡은 거대한 농발거미 이야기.

후쿠쇼지 절의 구리(사원에서 식사를 만들기 위한 건물) 지붕을 새로 이을 때 먹다 만 쥐를 물고 있는 처음 보는 대형 거미가 나왔다고 한다. 동물을 잡아먹는 대형 거미는 후쿠쇼지 절 이외의 곳에서도 목격되어 사람들이 무서워했다.

이러한 대형 거미와 관련된 이야기는 당 시대의 “유양잡조”나 명 시대의 “오잡조” 등 몇몇 중국 수필집에서도 볼 수 있으며, 그중에는 사람을 죽이는 위험한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미야자키현 지정문화재 시즈노 오다마키

  • 세로 26.6  가로 19.2  에도 시대 후기  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소장
  • 사권, 칠권, 구권, 십권  【사권, 구권: 전기 전시  칠권, 십권: 후기 전시】

‘시즈노 오다마키(賎濃於多満喜)’(이하,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본’)는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에 전해지는 설화집. 시마즈 가문 문서인 ‘시즈노 오다마키(倭文麻環)’(이하, ‘시마즈 가문본’)의 사본으로 생각된다. 미야코노조시마즈 가문본과 시마즈 가문본을 비교하면, 수록된 설화의 내용은 동일하지만 삽화들과 장면 묘사에서 차이를 볼 수 있다.

​시로무라사키이토단 오도시 오요로이

  • 에도 시대 후기  몸체 높이 31.0  개인 소장·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보관  【전체 기간 전시】

에도 시대 말기의 가고시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1809~1858)가 관례 때 착용했다고 전해진다. 헤이안 시대의 오요로이를 재현한 ‘복고조’ 갑주로, 곳곳에 있는 원 안에 십자 문양이 들어간 화려한 구조이며, 마에다테에는 시마즈 가문의 수호신으로 믿었던 이나리가 배치되어 있다.

시마즈 가문의 이나리 신앙은 초대 다다히사 탄생 전설을 바탕으로 한다. 전설에 따르면, 어머니 단고노 쓰보네(실명 다카시나 에이시)는 비 내리는 밤, 셋쓰국의 스미요시타이샤(현재의 오사카시 스미요시구)에서 도깨비불에 비추어 출산했다고 한다. 또한, 분로쿠·게이초의 역(임진왜란·정유재란) 때도 시마즈군에 가세하는 여우 전설이 남아 있으며, 시마즈 가문과 이나리가 깊은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시마즈령에서는 이나리 신앙이 널리 뿌리내렸다.

오이시 효로쿠 꿈 이야기 두루마리 그림  무라세 기토쿠 필

  • 에도 시대  세로 35.0  가고시마 현립도서관 소장  【전체 기간 전시】

본 사료는 에도 시대 중기의 가고시마번 무사 모리 마사나오(1761~1803)가 1784년에 썼다고 하는 문학 작품 “오이시 효로쿠 꿈 이야기”를 소재로 한 두루마리 그림이다. 설명은 없고, 그림으로만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이야기는 가고시마의 청년 오이시 효로쿠와 동료들이 사람을 홀리는 요괴(여우) 이야기를 들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효로쿠는 요괴를 퇴치하겠다고 큰소리치며 나갔지만, 맞서 싸우는 여우들에게 홀려 혼쭐이 난다. 하지만, 고생하며 실패를 거듭한 끝에 두 마리의 늙은 여우를 물리치고 귀환했다.

두루마리 그림 제작자인 무라세 기토쿠(1877~1938)는 아이치현 출신 화가로, 일본 근대 서양화의 아버지로 알려진 구로다 세이키(1866~1924)에게도 그림을 배운 인물이다. 모리 마사나오의 “오이시 효로쿠 꿈 이야기”는 호평을 얻어 사본과 간행본이 많이 보급되었지만, 무라세도 1929년 12월에 직접 주석을 달고 삽화를 그린 “사쓰마/기서  오이시 효로쿠 꿈 이야기”를 출판했다.

미야자키현 지정문화재 스와 사부로 이야기 두루마리 그림

  • 에도 시대 초기  세로 27.3  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소장  【전체 기간 전시】

스와신사의 기원을 이야기한 두루마리 그림. 스와 사부로(고가 사부로)가 땅속을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일을 겪은 후에 살아 돌아와서 스와다이묘진이 될 때까지를 설명과 함께 엮었다. 본 사료 외에 노노미타니초의 스와신사에도 같은 주제의 두루마리 그림이 전해져 현존하고 있다.

본 사료의 유래는 “쇼나이 지리지” 칠십육권에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1606년 조케이안 소덴이라는 인물이 시주가 되어 식재연명, 인법번창, 구원성취, 제인애락 등 바람을 담아 제작된 것이다. 본문과 회화를 제작한 것은 라이엔보 유세이라는 수행자이지만, 자세한 내용은 미상이다. 와카사국(현재의 후쿠이현 남서부)의 고카케산에 살았다고 하는 마왕(기린왕)과 뱀 모습을 한 사부로 등 괴이한 존재가 섬세한 붓놀림으로 그려져 있으며, 미술적으로도 뛰어난 사료이다.

4 시마즈 영내에서의 괴이의 수용과 문화·영정에의 반영

아즈마카가미  26권

  • 에도 시대 후기 ~메이지 시대  세로 27.4  가로 20.8  국립공문서관 소장  【전체 기간 전시】

“아즈마카가미”는 가마쿠라 시대에 성립한 역사서이다. 13세기 말~14세기 초에 가마쿠라 막부가 편찬했다고 한다. 권 수는 미상. 에도 시대 이후 유포본은 내각문고의 호조본(국립공문서관 소장)을 초본으로 한다.

전시 부분은 시마즈 가문의 초대인 시마즈 다다히사(?~1227)가 관직을 얻은 1222년 3월 8일과 1224년 10월 16일의 제사 기록이다. 다다히사는 음양도와 관련된 여러 가지 직무에 자주 종사했으며, 선행 연구에서 다다히사는 교토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일을 맡은 존재였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속일본기  1권

  • 에도 시대·1614년  세로 30.9  가로 22.3  국립공문서관 소장  【전기 전시】

전시 부분은 699년 5월 24일 항으로, 수험도의 창시자인 엔노 오즈노(생몰년 미상)가 쇼도시마(현재의 가가와현 쇼즈군)에 유배되었다는 기사이다.

엔노 오즈노는 7세기 말 무렵에 야마토국 가쓰라기산(나라현 고세시와 오사카부 지하야아카사카무라의 경계에 있는 산)에 살았다고 하는 주술사이다. 산악 수행을 하며 귀신을 부렸다는 전승이 남아 있다.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에 전해지는 사료 “쇼나이 지리지” 칠권, 십팔권에 기록된 오다테 겐준(?~1659)의 경력에 엔노 오즈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수행자가 되었다고 한다. 오다테 겐준은 제12대 혼고 다다요시(1590~1631)를 섬겼으며, 미야코노조의 도리조에(현재의 미야코노조시 미야코지마초)에 살았다.

미야자키현 지정문화재 쇼나이 지리지

  • 에도 시대 후기  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소장  【오권, 십팔권: 전체 기간 전시  육십일권, 육십칠권: 전기 전시】

“쇼나이 지리지”는 1798~1830년에 편찬된 지지(地誌)로, 112권과 습유 1권의 총 11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존하는 것은 103권. 제22대 시마즈 히사토모(1759~1821)의 명령으로 가로 혼고 스케키요(1762~1832) 및 기록자 아라카와 기호(1765~1835?)가 중심이 되어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다. 지역의 역사와 풍토, 명승, 절과 신사의 기원 등 미야코노조의 역사를 아는 데 있어 귀중한 사료이다.

오권  유바타구치 이 미야마루무라 겐키 미야가미
  • 세로 25.0  가로 16.5

오권에는 제10대 혼고 도키히사(1530~1596)가 창건한 겐키다이묘진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이 신사의 제신은 도키히사의 장남 스케히사. 스케히사는 1551년 11월 출생으로, 아명은 쓰루치요라고 한다. 관례를 치르고 나서는 지로, 나중에 스케히사로 자칭했다. 처음에는 미야코노조 니시노 성에서 살았지만, 그 후 야스나가 가네이시성으로 옮겼다. 무예가 뛰어난 인물로, 기모쓰키 씨와 오토모 씨와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어느 날, 가신 참언으로 인해 아버지 도키히사와 불화가 생겨 1579년 8월에 야스나가 가네이시성으로 300명 정도의 병사가 보내졌다. 스케히사는 가네이시성에서 칼로 자결했고, 시신은 조코인에 묻혔다.

스케히사가 죽은 후 갑주를 몸에 두르고 백마를 탄 무사의 망령과 원한을 호소하는 남자아이, 슬픔을 이야기하는 여자아이 등 다양한 귀신이 나타났으며, 사람들은 죽은 스케히사의 유령이라며 무서워했다. 도키히사는 애석한 마음으로 1581년에 와카미야하치만 절을 건립하고 스케히사의 영혼을 모셨다. 1595년에 혼고 씨가 게도인(현재의 가고시마현 사쓰마센다이시)으로 이봉될 때 신전도 함께 옮겨졌으나, 1600년에 원래의 장소로 옮겨 모셨다. ‘레이하치만’, ‘겐키묘진’을 거쳐 1682년에 ‘겐키다이묘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십팔권  시모나가에 혼유 미마야 고마쇼
  • 세로 25.0  가로 16.5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 가신이었던 오다테 겐준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겐준은 처음 신바루지 절의 요리모리라는 법사의 제자가 되었으며, 엔노 오즈노의 유파를 이어받아 수행자가 되었다. 요리모리에 대하여 겐지 이야기를 계승하고, 그 후 꽃꽂이를 좋아하여 교토의 이케노보 센코 밑에서 공부했다. 1659년 5월 6일에 세상을 떠나 난린지 절(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난린지초)에 묻혔다. “쇼나이 지리지” 17권에는 미야코노조에서의 수험도 모습이 기술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근세의 미야코노조에는 도잔파(진언종 승려 쇼보를 조상으로 하며, 교토 다이고지 절의 산보인이 본산인 일파)의 절이 6개 있었다. 그중 하나로 겐준이 공부한 신바루지 절이 거론되어 있다.

육십일권  야스히사무라 쓰루오카 구타마 하쿠산
  • 세로 25.0  가로 16.5

노무라 모 씨라는 인물이 미야코노조 시노이케 연못 주변에서 여자 유령을 만난 일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여자는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는데, ‘이 아이를 잠시 안아 주시면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노무라는 승낙하고 그 아이를 안았지만, 예상과 달리 무거운 진석이었다. 잠시 후 돌아간 유령이 고뇌에서 벗어났으니 사례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노무라는 달필처럼 글씨를 잘 쓰고 싶다고 답했고, 유령으로부터 벼루를 받았다. 그리고 노무라 가문에서는 대대로 서예에 뛰어난 인물이 태어났지만, 어느 날 이 벼루를 주군에게 진상하자 이후에는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사라졌다고 한다.

육십칠권  고짓초무라 조나이 쇼후쿠지 절 류쇼칸
  • 세로 24.9  가로 16.4

사이묘지 절 사당의 그림과 각 석탑의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사이묘지 절은 니곤지 절의 말사이자,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의 보다이지 절 중 하나였다. 그림을 보면 역대 영주와 그 실(처), 조상들의 석탑에 섞여 있는 ‘수학묘습대자묘’라는 무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무덤의 주인은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에게는 ‘학문의 묘’라고 불렸으며, 위패는 다이케이지 절에 있다. 이 인물은 부조리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유로 요괴가 되어 영내의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고 한다.

​미야자키현 지정문화재 삼국 명승 그림  이십

  • 메이지 시대  세로 26.5  가로 19.0  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소장  【전체 기간 전시】
미야코노조 분지 북부의 거점이었던 시와치성에 대하여 기록한 항.

시와치성은 쓰루무라에 있어 쓰루마루성이라고도 불렸다. ‘혼마루(우치노 성)’, ‘니노마루(나카노 성)’, ‘니시코시라에’, ‘신조’, ‘고조’의 5개의 구루와로 이루어져 있다. 혼고 씨가 대대로 소유했으나, 1532~1555년 기타하라 씨가 시와치성을 공격하여 탈취하자 관리직으로 시라사카 시모사노카미라는 인물이 배치되었다. 1543년 무렵에는 혼고 씨와 기타하라 씨의 영지 싸움이 격화되었고, 같은 해 5월에 혼고 다다스케, 다다치카가 이끄는 혼고군이 시와치성을 함락시켰다. 이 싸움으로 시라사카 시모사노카미를 비롯한 기타하라 군 500여 명이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혼고 씨는 시와치성을 탈환했지만, 시라사카 시모사노카미가 죽은 후 괴이한 일이 자주 발생하여 쓰루무라의 주민은 매우 두려워했다. 주민은 저주를 면하기 위해 신사를 지어 시라사카 시모사노카미를 모셨고, 이를 아라히토다이묘진이라고 칭했다.

기리시마야마 산 사방문 중 하나인 후도도에 대하여 기술한 항.

기리시마야마 산 곤고인 묘칸지 절의 기록에 따르면, 기리시마야마 산의 사방에는 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후도도는 남쪽에 있었다. 후도도의 건립에는 시마즈 요시히로(1535~1619)의 귀의승인 기리시마 수험자 구준(1663~1738)이 관여했다. 구준의 일기에는 당시 미야코노조 영주의 요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토목 공사 때 본가는 전국에 명령을 내려 녹나무와 삼나무 등 목재를 조달했으며, 미야코노조 영주로부터 기부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구준은 종종 미야코노조에서 일어난 천재지변이나 이상한 일에 대하여 기도를 의뢰받았다.

미야자키현 지정문화재 야스나가성도

  • 에도 시대 후기   세로 28.5  가로 39.0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 소장  【전체 기간 전시】

야스나가성은 제7대 혼고 도시히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전국 시대에는 혼고 씨가 손에 넣은 ‘쇼나이 12외성’ 중 하나로 꼽혔다. 또한 1599년에 발발한 쇼나이의 난에서는 공방의 요점 중 하나로 기능했으나, 1615년에 발포된 일국일성령에 따라 폐성되었다.

본 사료를 통해 야스나가성은 ‘혼마루’, ‘니노마루’, ‘가네이시’, ‘도리조에’의 구루와 4개(성을 구성하는 구획)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케히사가 칼로 자결한 ‘가네이시’는 후일에 이루어진 토지 개발 등으로 인해 현재 거의 파괴되었다.

​미야자키현 지정문화재 일일 장부  1641년 12월

  • 에도 시대  세로 26.5  가로 18.0  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소장  【전기 전시】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에 전해지는 사료에는 에도 시대에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의 관리가 기록된 20권의 일일 장부가 남아 있다. 본 사료는 그중 하나로, 제목은 ‘간에이 십팔년 십이월  일일 장부’이며, 1641년 11월 1일부터 1642년 3월 9일까지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 부서·기록자는 미상. 1642년 정월 5일 기사에 작년 12월 29일에 야스나가에서 괴이한 일이 발생하여 점을 쳤다고 되어 있다. 또한, ‘점대’ 기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점대를 이용한 역점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에 전해지는 사료에는 가신이 소장했던 ‘역경’이 포함되어 있으며, 무사의 교양으로 익히는 동시에 유사 시 신의를 전달하는 데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육일     당번  맑음

~전략~

하나  12월 29일 밤 8시 무렵, 야스나가에서 이상한 일이 있어 다다모치에게 명령하여 점을 치게 했습니다. 그 점의 결과는 부인에게 보고드렸습니다. 사자인 도요마루 요헤에 님도 동석한 자리에서 전해드렸는데, ‘기원하는 정도의 이야기이지, 특별한 의견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최근 신불 사당과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가 소홀해진 것은 문제라고 생각하여 ‘그 일에 대해서는 꼭 상담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관청에서의 상담 결과를 재차 보고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상담 결과는 부인에게도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  점의 결과는 ‘수(需)’의 ‘소축(小畜)’으로, 당소는 ‘상육(上六)’이었습니다. (지금은 초조해하지 말고 신중하게 기다리며 작은 일을 꾸준히 해나갈 것. 큰 행동은 삼가는 것이 안전)

 점 도구  점대·산가지

  • 에도 시대  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소장  【전체 기간 전시】

에도 시대의 한학자 에나쓰 세이칸의 자손을 통해 전해진 점 도구.

점대는 대나무를 가늘게 깎은 50개의 막대기, 산가지는 길이 약 10cm, 폭 약 2cm 정도의 목제 각봉으로 6개가 1묶음. 점은 고대 중국을 기원으로 한다. 복희로부터 시작되어 황제의 학문으로 발전했으며, 주나라 황제 문왕과 황자인 주공이 대성했다고 전해진다. 고대 중국에서는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 무·축이라 불리는 신관을 통해 주로 2종류(거북점, 시서)의 점법으로 신탁을 받았다. 시서가 크게 발전한 것은 주나라(기원전 11~기원전 8세기) 이후로, 시초라는 다년생 풀의 줄기를 이용했다. 후일에 다루기 편한 대나무를 사용하게 되어 현재의 점대가 되었다. 산가지는 음양을 나타내며, 점대로 점친 결과(점괘)를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사용한다.

에나쓰 세이칸은 1644~1648년 무렵에 우치노우라에 들어온 명나라 사람이다. 에도 시대 초기에 내란을 피해 광둥에서 이주해 왔다. 미야코노조의 중국인 거주지역에서 장사를 시작했으며, 이후 에나쓰 가문은 대대로 한학과 의업 등을 생업으로 했다.

미야자키현 지정문화재 고요닌자 일기  1647년 8월

  • 에도 시대  세로 26.3  가로 18.0  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소장  【후기 전시】

1647년 8월자 일기. 가로를 보좌하는 직책인 ‘요닌’이 기록한 것으로, 그날 있었던 특필할 만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전시 부분은 8월 20일 항으로, 하치만구 축제의 야부사메에서 탈 말을 사육하는 마구간의 널문에 수상한 꽃이 피었다는 신고가 관청에 들어왔다. 덴초지 절 등에서 괴상한 일을 막기 위한 어찰을 붙이도록 지시했다는 내용이다. 덴초지 절은 1538년 8월, 제8대 혼고 다다스케(1487~1559)가 건립한 진언종 계열 사원이다.

미야자키현 지정문화재 〔천문의 이해〕

  • 에도 시대  세로 32.9  가로 46.6  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소장  【전체 기간 전시】

하늘에 나타나는 별의 해설을 정리한 것.

첫머리에 항상 보이지는 않는 별을 요괴에 비유하여 “괴성”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이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괴성에 해당하는지를 그림과 함께 나타내는 동시에, 그것이 나타났을 때 일어나는 재앙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패성과 혜성이 나타나는 것은 화재, 병란의 징후라고 한다.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의 가신에는 음양도에 관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 괴이한 일 발생과 별의 이상에 대해 대처하기 위해 가신이 배운 것으로 생각된다.

가랏파

본 그림에는 가고시마현의 아쿠세키지마 섬에 산다고 하는 가랏파가 그려져 있다. 몸은 가늘고 손발이 긴, 특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산에서 길을 잃거나 배탈이 나면 가랏파의 짓이라고 한다.

갓파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요괴 중 하나로, 일본 전국 각지에 전승이 남아 있으며,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부른다. 가랏파는 주로 가고시마나 구마모토에서 부르는 호칭이지만, 미야자키의 전승에도 가랏파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미즈키 시게루 작 복제 원화]  세로 29.7  가로 42.0  【전체 기간 전시】

미즈키 시게루가 제작한 요괴화의 복제.

 갓파의 손발

  • 에도 시대  [손] 세로 4.0  가로 8.2  [발] 세로 2.0  가로 14.5  개인 소장·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보관  【전체 기간 전시】

갓파 앞모습 그림·뒷모습 그림

  • 에도 시대  세로 27.4  가로 39.8  개인 소장·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보관  【전체 기간 전시】

 갓파의 손발 유래서

  • 에도 시대  세로 26.7  가로 38.7  개인 소장·미야코노조 시마즈 저택 보관  【전체 기간 전시】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에 전해져 내려온 갓파의 손발과 관련 자료.

유래서에 따르면, 이 손발의 소유자는 미마타초 가지야마의 강에 나타난 갓파라고 한다. 분세이 연간(1818~1830)년의 어느 날, 가고시마번 무사인 가미무라 규스케가 갓파를 발견하고 사살했다가 병을 앓게 되었다. 그래서 규스케는 지인인 오카와라 세이소쿠의 소개로 수험자에게 주술을 의뢰했고 무사히 회복했다. 규스케는 사례로 그 갓파의 손발을 세이소쿠에게 선물했고, 세이소쿠는 그중 한 쌍을 오카와라 가문에, 다른 한 쌍을 미야코노조 시마즈 가문에 헌상했다고 전해진다.

인쇄물  스이코 상전 묘약 주술(갓파)

  • 에도 시대·19세기  세로 22.5  가로 31.0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  【전기 전시】

약의 효능을 설명하는 내용에 갓파 그림 9점이 첨부된 2장 1묶음의 인쇄물.

본 사료에서 묘사된 갓파의 신체는 ‘스이코 십이품도’ 등과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그려진 수가 생략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약 상인이 배포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명확하지 않다.

인쇄물  가와타로 십식품도

  • 에도 시대·19세기·1855년  세로 37.5  가로 51.5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  【후기 전시】

‘가와타로 십식품도’는 각지에서 목격 및 포획된 갓파를 그린 인쇄물이다.

4족보행·2족보행별, 몸통 색 등 다양한 특징을 가진 갓파를 확인할 수 있다. 비슷한 인쇄물이 여러 점 남아 있으며, 에도 시대의 갓파 연구서 “스이코 고랴쿠”를 원류로 하고 있다. “스이코 고랴쿠”는 쇼헤이자카 학문소의 교수였던 유학자 고가 도안(1788~1847)이 1820년에 정리했다. 일본 및 중국의 지지(地誌)와 설화집의 갓파와 관련된 기사와 더불어, 실제로 갓파를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 서적이다.

또한, 본 사료에는 갓파 해설과 함께 ‘예전에 맺은 약속을 잊지 말아라 문을 지키는 스가와라여’라는 노래가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수해를 막기 위한 주술이며, 근세 이후 유사한 주문이 각지에 전해진다. 갓파를 요괴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로 생각하는 에도 시대 사람들의 관념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갓파 대합 각조 네쓰케

  • 에도 시대·19세기  높이 2.1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후기 전시】

네쓰케란, 인롱이나 염낭, 담뱃갑 등 허리에 차는 장신구, 주머니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허리띠에 끼워 이용하는 멈추개. 그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무로마치 시대 말기 무렵이라고 한다. 공예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에도 시대인 17세기 후반 무렵으로, 목재를 비롯하여 상아나 사슴, 물소의 뿔, 금속, 귀판 등 다양한 소재를 정교하게 세공한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다. 본 작품은 동물의 뿔을 재료로 사용했으며, 대합을 오르는 갓파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갓파의 손

  • 에도 시대  길이 9.0  야나가와 고문서관 소장  【전체 기간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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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 示에도 시대  세로 15.5  【전체 기간 전시】

아시즈카무라(현재의 구루메시 조지마마치)의 강에 출몰한 갓파에게서 잘라낸 것이라고 전해지는 손. “신고 미즈마군지(誌)”에 수록된 전설에 따르면, 본 사료는 이 지역의 의사였던 에가시라라는 인물이 강에서 말을 씻기고 있을 때, 갓파가 말을 강속으로 끌어당기려고 했기 때문에 칼로 손을 잘라내서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갓파의 손은 오랫동안 에가시라 가문에서 보관했으나, 그 후 야나가와의 히로마쓰 가문으로 옮겼다. 갓파의 손에는 서장이 부속되어 있다. 본 서장을 통해, 갓파의 손은 구루메번의 대를 이을 아들이었던 아리마 요리요시(1793년에 폐적)에게 상람되었으며, 요리요시는 부적으로 삼기 위해 손가락 끝을 원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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